2009년 06월 14일
사랑의 역사
1.
배가 도착했다. 아주 먼 곳에서 출발한 배였으므로 짐을 가득 싣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많은 짐을 실은 배는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오랬동안 육지에 닿은 적이 없던 배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 배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이 낯설고 허망한 곳으로 흘러 들어온 배는 도착을 알렸다.
나는 그곳에서 당신을 만났다. 당신을 만난 건 그곳에 당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돌아보면 당신은 표현이 많은 사람이었다. 표현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명백한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트렁크 가득 꽃들을 선물했을 때 그 꽃들을 심고 그 꽃들이 잘 자라나지 않자 그것을 뽑아버린 다음, 다른 꽃을 심었으니까. 자신의 감정을 선명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태어나길 잘 태어난 사람이다. 때로 그 명백한 표현들은 몇 줄의 시보다 아름답다.
당신은 실온의 사람이었다. 냉장고에 넣었다가 나온 것 같은 차가운 사람도 급하게 전자레인지로 돌려져 따뜻해진 사람도 아니었다. 당신은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것은 마음의 키였다. 또 당신은 좋아하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덮어주려 당신은 좋아하는 것들을 늘이는 것 같았다. 술의 향기를 마실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술을 마시면 왜 기분이 좋아지면서 솔직해지는지 알아요? 그건 바보가 되기 때문이에요."
내 말에 당신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그런 것 같다며 웃었다.
당신은 줄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내개 없는 것들을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 그 자체가 불운이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처음이었으므로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당신을 그렸다.
사랑은 영원할 거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사랑은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인 나였지만 나의 그런 생각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당신은 내 곁에 있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당신의 습관은 서로 묶어 놓은 줄을 툭 건드려 보는 것이었으며 나의 습관은 그럴 때마다 그 줄을 내 앞으로 잡아당기는 일. 그러면서도 서로 팽팽해지기만은 원하지 않았던 의지 혹은 습관.
2.
어느 화려한 자리를 빠져나와 어두운 골목길에서 시시덕거리며 감자칩을 사고 내가 '감자칩에 소금이 묻어있지 않다면'이라는 가정을 세우다가 감자는 소금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둘이서 검은 길 위에 감자칩을 이어 붙여 '사랑해'라고 써놓고 도망쳤던 밤.
당신과 나는 다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화려한 자리로 돌아가야 했으나 높은 힐을 신은 당신도 구두를 신은 나도 내려왔던 오르막길을 다시 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열 장의 그림을 완성해야 이곳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만 시작만 해 놓고 오랫동안 나는 열 번째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열 번째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사이, 나는 당신에게 말했다.
"예전에 우리는 무인도였대요. 그때 우리는 나 말고 다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우리는 그렇게 혼자였대요. 그런데 혼자인 게 너무 힘이 들어서 다른 무인도하고 가까워지면 어떨까 생각했대요. 그래서 무인도는 하나씩 둘씩 가까워지고 그게 땅이 됐대요. 예전에 무인도였던 우리는 무인도를 만나 더 이상 무인도가 되지 않은 거래요."
당신은 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조금 가까이 앉는 것 같았다.
"그렇게 땅을 이어 붙이고, 나눠진 하늘을 이어 붙여서 그 아래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대요. 외로움이란 말이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쓸쓸함이란 말이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들은 무인도라는 말을 잊어 갔고... 그 자리에 '사랑'이라는 말이 오게 된 거래요.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심장에 박혀 의미가 되었대요."
3.
오후 다섯 시에 마시는 보드카, 창밖의 초승달을 닮은 크루아상, 저녁식사를 끝냈다는 의미의 더블 에스프레소 한 잔. 이 모든 것이 순하게 엉킨 어느 저녁, 나는 당신을 떠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자작나무 길을 지나 당신의 집 문을 두드린다.
"당신은 나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떠나려고 합니다."
남겨진 사람 마음이 더 아플 거라는 건 예측이며 추측일 뿐, 떠나는 사람의 마음도 아플 수 있다는 걸 난생처음 알면서 빽, 울컥해진다.
배는 떠날 시간이 되었다. 싣고 왔던 모든 짐을 다시 실을 수는 없었다. 한번 내린 짐을 온전히 도로 실을 수 있기란 쉽지 않은 일. 더군다나 그 짐만이 아닌 다른 짐들이 늘어 있다는 사실. 더군다나 열 장의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으니 그 그림을 배에 실을 자격도 없다. 배가 떠난다. 그 배가 어디에 도착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배가 나아가는 방향이 아닌, 내가 잠시 머물렀던 당신이라는 풍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서서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정박은 위험해."
그리고 또 이렇게 중얼거린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새에게도, 나무에게도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는 법이지. 아무리 별 거 아닌 풍경이고, 시간이라 해도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이야."
-이병률
배가 도착했다. 아주 먼 곳에서 출발한 배였으므로 짐을 가득 싣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많은 짐을 실은 배는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오랬동안 육지에 닿은 적이 없던 배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 배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이 낯설고 허망한 곳으로 흘러 들어온 배는 도착을 알렸다.
나는 그곳에서 당신을 만났다. 당신을 만난 건 그곳에 당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돌아보면 당신은 표현이 많은 사람이었다. 표현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명백한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트렁크 가득 꽃들을 선물했을 때 그 꽃들을 심고 그 꽃들이 잘 자라나지 않자 그것을 뽑아버린 다음, 다른 꽃을 심었으니까. 자신의 감정을 선명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태어나길 잘 태어난 사람이다. 때로 그 명백한 표현들은 몇 줄의 시보다 아름답다.
당신은 실온의 사람이었다. 냉장고에 넣었다가 나온 것 같은 차가운 사람도 급하게 전자레인지로 돌려져 따뜻해진 사람도 아니었다. 당신은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것은 마음의 키였다. 또 당신은 좋아하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덮어주려 당신은 좋아하는 것들을 늘이는 것 같았다. 술의 향기를 마실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술을 마시면 왜 기분이 좋아지면서 솔직해지는지 알아요? 그건 바보가 되기 때문이에요."
내 말에 당신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그런 것 같다며 웃었다.
당신은 줄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내개 없는 것들을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 그 자체가 불운이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처음이었으므로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당신을 그렸다.
사랑은 영원할 거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사랑은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인 나였지만 나의 그런 생각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당신은 내 곁에 있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당신의 습관은 서로 묶어 놓은 줄을 툭 건드려 보는 것이었으며 나의 습관은 그럴 때마다 그 줄을 내 앞으로 잡아당기는 일. 그러면서도 서로 팽팽해지기만은 원하지 않았던 의지 혹은 습관.
2.
어느 화려한 자리를 빠져나와 어두운 골목길에서 시시덕거리며 감자칩을 사고 내가 '감자칩에 소금이 묻어있지 않다면'이라는 가정을 세우다가 감자는 소금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둘이서 검은 길 위에 감자칩을 이어 붙여 '사랑해'라고 써놓고 도망쳤던 밤.
당신과 나는 다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화려한 자리로 돌아가야 했으나 높은 힐을 신은 당신도 구두를 신은 나도 내려왔던 오르막길을 다시 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열 장의 그림을 완성해야 이곳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만 시작만 해 놓고 오랫동안 나는 열 번째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열 번째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사이, 나는 당신에게 말했다.
"예전에 우리는 무인도였대요. 그때 우리는 나 말고 다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우리는 그렇게 혼자였대요. 그런데 혼자인 게 너무 힘이 들어서 다른 무인도하고 가까워지면 어떨까 생각했대요. 그래서 무인도는 하나씩 둘씩 가까워지고 그게 땅이 됐대요. 예전에 무인도였던 우리는 무인도를 만나 더 이상 무인도가 되지 않은 거래요."
당신은 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조금 가까이 앉는 것 같았다.
"그렇게 땅을 이어 붙이고, 나눠진 하늘을 이어 붙여서 그 아래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대요. 외로움이란 말이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쓸쓸함이란 말이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들은 무인도라는 말을 잊어 갔고... 그 자리에 '사랑'이라는 말이 오게 된 거래요.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심장에 박혀 의미가 되었대요."
3.
오후 다섯 시에 마시는 보드카, 창밖의 초승달을 닮은 크루아상, 저녁식사를 끝냈다는 의미의 더블 에스프레소 한 잔. 이 모든 것이 순하게 엉킨 어느 저녁, 나는 당신을 떠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자작나무 길을 지나 당신의 집 문을 두드린다.
"당신은 나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떠나려고 합니다."
남겨진 사람 마음이 더 아플 거라는 건 예측이며 추측일 뿐, 떠나는 사람의 마음도 아플 수 있다는 걸 난생처음 알면서 빽, 울컥해진다.
배는 떠날 시간이 되었다. 싣고 왔던 모든 짐을 다시 실을 수는 없었다. 한번 내린 짐을 온전히 도로 실을 수 있기란 쉽지 않은 일. 더군다나 그 짐만이 아닌 다른 짐들이 늘어 있다는 사실. 더군다나 열 장의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으니 그 그림을 배에 실을 자격도 없다. 배가 떠난다. 그 배가 어디에 도착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배가 나아가는 방향이 아닌, 내가 잠시 머물렀던 당신이라는 풍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서서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정박은 위험해."
그리고 또 이렇게 중얼거린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새에게도, 나무에게도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는 법이지. 아무리 별 거 아닌 풍경이고, 시간이라 해도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이야."
-이병률
# by | 2009/06/14 21:45 | Emotional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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